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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고통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가?, 3부 중 1부 (1993년 3월 16일, 호주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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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세상에 많은 고통은 물론 행복도 있음을 알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왜 고통이 있으며 어떻게 행복을 찾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많은 고통을 없애고 더 많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상을 힘을 얻어서 그 힘을 통해 행복과 고통을 무대 연극처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사를 영화를 보듯이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약간의 감정이 일겠지만 이 감정에 지배당하거나 이 감정 속으로 빠져 들지는 않을 겁니다.

안녕하세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위대한 나라와 멋진 도시 시드니에 오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여러분은 호주의 아름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아주 감사해요. 처음 와보기 때문에 아마 여러분보다 더 할겁니다. 이곳은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고, 친절합니다.

호주 사람들이 최소한 외면적인 지상낙원을 갖게 되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해요. 우리가 내면의 낙원도 갖고 있다면 완벽하겠지요. 완벽한 조건을 갖췄기에 그 어떤 천국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이렇게 와주시고 서로를 알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호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오고 싶지 않았고 전혀 올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호주에 있는 동료 수행자들의 계속된 초청으로 여기에 올 영광을 갖게 된 겁니다. 그렇더라도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여러분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이 우리에게 준 사랑과 그 모든 것을 교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어요.

하지만 몇몇 호주의 동료 수행자들이 너무나 친절하고 너무 간절하게 초청했기 때문에 소위 제자들의 사랑과 신의 뜻에 의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를 알게 되고 보잘것없는 내가 오게 됨으로써 적어도 서로를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것이 내가 여기에 와야만 했던 유일한 목적일겁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 초대되어 가든 언제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들의 근원인 자신의 신의 왕국과 자신의 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부처나 신 또는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힘을 찾느냐는 질문을 항상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곳에 가는 목적은 그 나라 사람들과 어떻게 자신의 지혜나 내면에 있는 무상의 힘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해 내가 축척한 지식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질문들을 자주 받아요. 왜 무상사라는 호칭을 쓰느냐? 내가 자신을 무상사라 부르는 건 너무 거만할까요? 『아니요, 이건 내 아버지 이름이죠』

마치 여러분이 스미스씨면 여러분의 딸도 역시 스미스씨가 되듯이 이것은 우리와 여러분의 아버지이름이기에 여러분도 자신을 무상사로 부를 수 있죠. 나는 실제로 이 모든 것을 잊었지만 사람들이 생각나게 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세상에 많은 고통은 물론 행복도 있음을 알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왜 고통이 있으며 어떻게 행복을 찾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많은 고통을 없애고 더 많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힘을 얻어서 그 힘을 통해 행복과 고통을 무대 연극처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사를 영화를 보듯이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약간의 감정이 일겠지만 이 감정에 지배당하거나 이 감정 속으로 빠져 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힘이며, 이 세상은 물론 세상 너머의 다른 현상을 내다보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 너머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맞지 않아요. 이 세상 너머라는 게 없으니까요. 모든 세상은 내면에 있죠. 그리고 내면이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아요. 왜냐하면 외면도 내면도 없거든요.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언어로 내면의 감정이나 직관적인 이해를 표현해야 하기에 그런 말을 씁니다.

사실 깨달은 후에는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내면에 이 무상의 힘이나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왜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서 자신들을 안과 밖에 있는 모든 고통과 동일시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세상 사람들이 깨달음을 찾고 싶어하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깨달은 뒤에도 여러분은 이전과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걸 수용하며, 주어진 모든 것이 신성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신성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르치거나 인도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람이 신의 왕국을 찾는 진정한 구도자에게 유용한 어떤 지침을 말해 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채식(비건)이나 성경의 십계, 불교의 오계 등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 구도자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들로 보다 빠른 결과를 거두게 하며, 소위 해탈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미 해탈했음을 안다면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대개가 해탈했는지 모르기에 명상 수행이나 채식(비건), 도덕적인 계율과 같은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흥정하듯 말하지요. 『저는 입문을 원하지만 계율이나 채식(비건)은 못해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 난 말합니다. 『당신이 남들과 축구를 하고 싶은데 테니스 공이나 테니스 장비를 가져와도 될까요? 그러면 축구도 전혀 못하고 경기만 망치고 당신 자신도 축구 경기를 즐기지도 못하면서 엉망이 될 겁니다』

우리가 아직 무지한 마음상태에 있는 한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깨달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뭣 하러 깨닫겠어요? 우리가 여전히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서 그 행복을 남들에게 주기 원하는 한 깨달음이 필요한 겁니다. 이 세상이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다음 생에 여기 오거나 다시 무엇으로 태어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물론 필요 없지요. 그래도 세상의 번영과 지구의 평화를 염려한다면 물론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소위 깨닫기 전에는 나는 이른바 아주 좋은 인생을 살고 매우 화목했었지요. 100%는 아니지만 남들과 비교하면 화목했지요. 그리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고 없는 것을 갖고 싶은 욕망도 없었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이생에는 부나 명성, 건강, 행복한 결혼, 친구와 같은 많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 마음속의 공허함을 완전히 채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무상의 지혜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대지혜를 깨달은 뒤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가정 생활을 꾸리고 결혼생활을 즐기며 아이들을 키우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겠지만 전체적인 견해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린 만족하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그 만족은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난 뒤나 좋은 친구를 만나거나 아주 즐거운 파티를 한 뒤에 느끼는 만족 같은 것이 아니죠. 이 만족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파티를 하든 말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좋은 지위를 가졌든 아니 가졌든, 우리가 부자이든 부자가 아니든, 건강하든 아프든 간에 이 마음의 안정과 우리 존재의 평화로움은 오직 깨달았을 때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 옵니다.

이를테면 인도나 다른 나라의 많은 출가승들은 아주 단순하게 삽니다. 동굴이나 텐트에 살거나 어디든 잘 수 있는 곳이면 자지만 매우 행복하고 만족해하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 그런 조건에서 지내라고 강요한다면 매우 불행해하며 더 많은 부나 명성 또는 무엇이든 마음속에 갈망하는 걸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수행을 할 때에도 최고의 깨달음의 목표를 이루는 가장 좋고 가장 빠른 길을 찾지 못한다면 역시 영적인 체험을 끊임없이 갈망할 겁니다.

많은 다른 법문들이 깨달음을 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화가 나는 거지요.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아무 일도 없거나 너무 적으면 신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걸 신이라 한다면요.

신이 뭐지요? 많은 사람이 묻지요. 인간인가요, 아니면 비인격적인 힘인가요? 나는 언제나 둘 다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식으로 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뭔지 직관적인 이해를 통해 인식할 겁니다.

우리는 신을 우리의 소망과 약속을 채워주는 자라고 상상하는데 사실입니다. 신이 뭔지 너무 물질적으로 표현했지만 말이에요. 우리는 신을 거기에 앉아서 우리가 원하는 캔디나 케이크를 주는 사람으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삶은 자동적으로 채워지며 인생은 충족되지요. 캔디가 있건 없건 우리는 만족합니다.

이건 신의 역설적인 면이죠. 신은 자신의 충족된 자아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요. 자아를 성취하면 어떤 면에서도 결핍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이 모든 불가사의한 힘, 각종 초자연적인 힘은 자연히 우리에게 옵니다.

대부분의 스승은 초자연적인 힘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 물질주의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더 높은 각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영역으로 나아갈 흥미나 힘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인도의 한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좋은 왕이었고 백성을 사랑했지요. 어는 날 그는 그의 전 재산과 보물을 백성에게 나눠주려 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와서 아무 조건 없이 펼친 물건 중에서 집어가면 됐지요. 왕은 자녀도 가족도 없었으므로 백성을 가족처럼 사랑했습니다.

모두들 와서 마음속에서 원하는 물건을 집어갔어요. 그런데 한 소녀는 왕이 자신의 소유 물건을 쭉 나열해 놓은 궁전의 뒤쪽 방으로 곧장 나아가서 왕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어요. 『폐하도 되나요?』 그러자 왕은 놀라서 말했어요. 『왜 그러느냐? 밖에 있는 나의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소녀는 말했어요. 『전 폐하만을 원해요』 그러자 당연히 왕은 누군가가 그의 보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어요. 물론 왕은 그녀를 허락했고 둘은 결혼해서 늘 그렇듯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또 어떻게 됐는지 알지요? 그 소녀는 원하는 게 없었지만 온 나라가 그녀 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과 모든 재산도요. 따라서 우리 길도 신통력을 옹호하진 않습니다. 하나 신통력이 없진 않죠. 크게 깨닫거나 작게 깨달은 뒤에 원하는 모든 힘이 생기지만 너무 많은 힘이 생겨서 얼마나 많은 힘이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집안 한 구석에 매달리기 보단 그 구석을 포함해 집 전체를 갖는 거죠.

일부 사람들은 내면의 천상의 빛과 소리에 관한 이 즉각 깨달음 법문을 배우러 오기 전에 여러 가지 다른 명상법을 수행했고 아마 일부 불가사의한 힘을 성취했을 겁니다. 아주 멀리 있는 걸 보는 힘이나 근처에 없는 뭔가를 듣는 힘을요.

예로 여기 앉아서 런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거나 파리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들을 수 있죠. 예, 이것이 초능력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죠. 이건 아마도 스파이나 007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법문에 입문한 후에는 이 힘을 다소 잃거나, 더 좋은 것을 보거나 더 나은 지식을 알아서 스승에게 이 신통력을 가져가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아마 그들이 신통의 단계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이전의 신통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걸 겁니다. 둘째, 왜 그들이 이 힘을 잃지 않고 스승에게 가져가라고 간청할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마음 속으로 이 힘에 어느 정도 집착해서 스승이 그들 스스로 버리든 말든 선택권을 준 겁니다.

여러분이 의식의 더 깊은 영역이나 더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나아간 후에는 소위 신통력이 수행에 도움보다는 장애가 된다는 걸 알게 되지요. 따라서 자연히 신통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령 여기서 삼매나 아주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의 참된 자아의 초자연적 각성 상태에서 천상과 지상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게 되면 런던에서 일어나는 매우 무서운 일을 보기도 합니다. 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할까요? (안 편합니다) 안 편하지요. 예, 맞습니다.

예, 오히려 절망하며 여러분은 기분이 상하지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다른 곳의 상황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절망스럽고 비참하지요.

혹은 여러분이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거나 아내의 마음을 보니 당신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명상하려고 앉아 있는게 도움이 될까요? (아니오) 아니지요.

누군가 당신에게 증오심을 품었다고 합시다. 생각을 투시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둘 다에게 불편한 느낌이 들겠지요.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은 그들 내면에 때로 통제할 수 없는 느낌과 감정을 많이 갖는데 그것은 그들과 관계가 있거나,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 모든 걸 아는 건 쓸모 없는 일이지요. 그러면 우린 세속적인 일만 항상 걱정하고 그걸 넘어서서 우리 자신을 가장 위대한 지혜와 결합하지 않습니다.

금세기에는 많은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내면의 이 큰 힘을 아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방향으로 갈지 혼란스럽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신통력과 치유능력, 벽을 꿰뚫어 보거나 공중을 걷는 등의 눈앞의 결과에 마음을 뺏겨서 명상 수행과 영적인 공부의 주요 목적을 잊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래선 안되죠.

왜냐하면 우리가 진아와 내면의 최고 지혜를 알면 모든걸 알게 되니까요. 내 생각엔 그것이 어떤 길에 집중할지 판단하는 최상의 척도이자 근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죠.

『먼저 신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신의 왕국은 저 멀리 천국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 있고 우리 모두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열어서 매일 사용하면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됐고, 얼마나 지혜롭고, 사랑이 많고 만족하는 사람이 됐는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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